에스겔 23장, 두 음녀 오홀라와 오홀리바: 배교와 음란의 끝은 파멸

에스겔서의 예언은 종종 강렬하고 직설적이지만, 23장에 이르러서는 그 표현의 수위가 독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들 정도로 파격적입니다. 이 장은 '오홀라'와 '오홀리바'라는 두 자매의 끝없는 음행과 정욕을 통해, 각각 사마리아(북이스라엘)와 예루살렘(남유다)의 하나님을 향한 배신과 정치적·종교적 타락을 신랄하게 고발합니다. 선정적이고 충격적인 이 비유는 단순한 도덕적 질책을 넘어, 언약 관계를 파괴한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깊은 슬픔과 불타는 질투, 그리고 그로 인한 피할 수 없는 심판의 당위성을 절절하게 드러냅니다. 이 불편하지만 강력한 메시지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Allegorical depiction of Oholah (Samaria) and Oholibah (Jerusalem) from Ezekiel chapter 23, symbolizing their spiritual adultery through idolatry and foreign alliances, leading to divine judgment.

시대적 배경과 맥락 소개

에스겔 23장의 비유는 남유다 왕국의 멸망이 임박한, 혹은 이미 일부 백성이 바벨론으로 끌려간 절망적인 시기를 배경으로 합니다. 북이스라엘(사마리아)은 이미 오래전(기원전 722년) 앗수르에 의해 멸망하여 역사 속으로 사라진 상태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스겔은 북이스라엘의 죄악을 다시 상기시키며, 남유다(예루살렘)가 그 전철을 똑같이, 아니 더욱 심하게 밟고 있음을 경고합니다. 당시 남유다는 앗수르, 애굽, 바벨론 등 주변 강대국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인간적인 외교술과 군사 동맹에 더 치중했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행위는 단순한 외교를 넘어, 이방 신들과 그들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종교적 혼합주의와 배교로 이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및 유다와 맺은 언약 관계를 종종 결혼 관계에 비유하셨는데, 그들이 이방 세력과 동맹을 맺고 그들의 우상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남편을 배신하고 다른 남자들과 음행을 저지르는 것과 같은 극악한 행위였습니다. 에스겔 23장의 선정적인 비유는 바로 이러한 영적 간음을 가장 충격적이고 혐오스러운 방식으로 드러내어, 백성들의 무감각해진 양심을 흔들어 깨우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신실함과 순결함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하며, 세상의 유혹과 타협하여 신앙의 본질을 잃어버리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핵심 사건 또는 본문 요약: 두 음녀 자매, 오홀라와 오홀리바의 타락

에스겔 23장은 한 어머니에게서 난 두 딸, 언니 '오홀라'(그녀의 장막)와 동생 '오홀리바'(나의 장막이 그녀 안에 있다)의 이야기를 통해 북이스라엘(사마리아)과 남유다(예루살렘)의 타락상을 폭로합니다. 이들의 이름 자체도 하나님의 성막/성전과 관련되어, 처음에는 하나님께 속했으나 후에 타락했음을 암시합니다.

  • 언니 오홀라 (사마리아)의 음행 (1-10절):
    • 하나님께 속하였으나 애굽에서부터 음행을 시작함 (어릴 때부터의 타락).
    • 이웃 앗수르 사람들을 연모하여 그들의 화려한 군복과 위용에 빠져 음행함 (앗수르와의 동맹 및 우상숭배).
    • 앗수르의 우상들로 자신을 더럽힘.
    •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녀가 연모하던 앗수르 사람들의 손에 그녀를 넘겨 비참하게 멸망당하게 하심 (자녀 빼앗김, 칼에 죽임당함, 여자들의 이야깃거리가 됨).
  • 동생 오홀리바 (예루살렘)의 더욱 심한 음행 (11-35절):
    • 언니 오홀라의 멸망을 보고도 깨닫지 못하고 더욱 음란해짐.
    • 앗수르 사람들(벽에 그려진 갈대아 사람들의 형상)을 보고 정욕을 불태움.
    • 바벨론 사람들과 동침하여 자신을 더럽히다가, 그들에게 싫증을 느끼고 마음이 떠남 (정치적 변덕).
    • 그러나 오히려 어릴 적 애굽에서의 음행을 더욱 그리워하며 애굽과의 동맹을 추구함.
    • 하나님께서는 그녀가 싫증 내어 떠났던 옛 정부들(바벨론 등)을 다시 불러 그녀를 치게 하실 것을 선포하심. 그들은 잔인하게 그녀를 공격하여 코와 귀를 베고, 자녀들을 빼앗고, 불사르며, 옷을 벗기고 아름다운 물건을 빼앗을 것임.
    • 그녀는 자신이 연모하던 자들의 손에 넘겨져 수치와 조롱을 당하고, 그 음행의 대가로 언니 오홀라가 마셨던 '놀람과 패망의 잔'을 마시게 될 것임. 이 잔은 깊고 넓어 조롱거리가 될 것이며, 술과 슬픔으로 가득 찬 잔임. 그녀는 그 잔을 마시고 깨뜨리며 자기 유방을 찢을 것이라고 예언됨.
    • 그 이유는 그녀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등 뒤로 던졌기 때문임.
  • 두 자매에 대한 최종 심판 선언 (36-49절):
    • 에스겔은 다시 한번 그들의 가증한 일(피 흘림, 우상 숭배, 자녀를 우상에게 제물로 바침, 성소 더럽힘, 안식일 범함 등)을 고발하라는 명령을 받음.
    •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화장하고 단장하며 이방 남자들을 맞아들임.
    •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재판관들이 그들을 간음한 여인과 피 흘린 여인을 벌하듯 심판하게 하실 것임. 무리가 그들을 돌로 치고 칼로 죽이며 자녀들을 죽이고 집들을 불사를 것임.
    • 이로써 땅에서 음란이 그치게 되어 모든 여인이 교훈을 받고 그들의 음행을 본받지 않게 될 것임. 그들은 그 음란의 죄 값을 담당하고 우상 숭배의 죄를 짊어지게 될 것이며, 그제야 하나님이 주 여호와이신 줄 알게 될 것이라고 선포됨.

이 두 자매의 타락과 심판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습니다:

구분 오홀라 (사마리아/북이스라엘) 오홀리바 (예루살렘/남유다)
주요 음행 대상 애굽, 앗수르 애굽, 앗수르, 바벨론 (더욱 적극적)
죄의 정도 심각함 언니보다 더욱 심각함 (경고를 무시)
심판의 주체 연모하던 앗수르 싫증 냈던 옛 정부들 (바벨론 등)
심판의 결과 멸망, 자녀 빼앗김, 죽음 수치, 조롱, '놀람과 패망의 잔' 마심, 완전한 파괴
심판의 목적 음란을 그치게 함, 교훈을 줌, 하나님을 알게 함

철학적/존재론적 상징 해석: 음녀 비유와 하나님의 질투

에스겔 23장의 음녀 비유는 그 표현의 선정성 때문에 해석에 주의를 요하지만, 그 이면에는 깊은 신학적, 철학적, 존재론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첫째, 결혼과 언약의 은유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구약 성경에서 종종 남편과 아내의 결혼 관계로 묘사됩니다. 이 비유는 단순한 비유를 넘어, 언약 관계의 본질이 상호 신실함과 배타적인 사랑에 있음을 강조합니다. 오홀라와 오홀리바의 음행은 단순히 이방 신을 섬긴 것을 넘어, 언약의 파트너이신 하나님을 향한 인격적인 배신이자 관계의 파괴를 의미합니다. 이는 마치 배우자의 외도가 단순한 성적 일탈을 넘어 결혼 서약의 근간을 흔드는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와 이방 세력 의존은 하나님과의 '결혼 언약'을 깨뜨리는 행위였으며, 이는 존재론적으로 하나님과의 분리, 즉 영적 죽음을 초래하는 것이었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질투(Divine Jealousy)'라는 개념입니다. 현대적 관점에서 '질투'는 부정적인 감정으로 여겨지기 쉽지만, 성경에서 하나님의 질투는 그의 거룩하심과 언약적 사랑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마땅히 받아야 할 영광과 사랑을 우상이나 다른 세력에게 빼앗길 때 질투하십니다. 이는 마치 남편이 아내의 사랑을 다른 남자에게 빼앗겼을 때 느끼는 배신감과 분노와 유사합니다. 에스겔 23장의 격렬한 분노와 심판의 언어는 바로 이 '하나님의 질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것은 변덕스러운 감정이 아니라, 깨어진 언약 관계에 대한 의로운 분노이자, 당신의 백성을 향한 변치 않는 사랑 때문에 더욱 깊어지는 아픔의 표현입니다. 키르케고르가 신앙을 '무한한 열정'으로 묘사했듯, 하나님의 사랑 역시 무한한 열정을 동반하며, 그 열정이 배신당했을 때의 아픔 또한 무한한 것입니다.

셋째, 타락의 점진성과 심화 과정입니다. 오홀리바(예루살렘)는 언니 오홀라(사마리아)의 멸망을 보고도 교훈을 얻기는커녕 더욱 심한 음행에 빠집니다. 이는 죄의 중독성과 자기 파괴적 성향을 보여줍니다. 한번 죄의 길에 들어서면 점점 더 깊이 빠져들고, 이전의 실패로부터 배우지 못하며, 결국에는 스스로를 파멸로 이끌게 됩니다. 이는 개인의 삶뿐 아니라 공동체와 국가의 역사에서도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패턴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는 그의 《고백록》에서 죄의 유혹과 그로 인한 내적 갈등을 생생하게 묘사했는데, 오홀라와 오홀리바의 이야기는 이러한 인간 본성의 어두운 측면을 국가적 차원에서 보여주는 듯합니다. 그들의 정욕은 만족을 모르고 더욱 자극적인 것을 찾아 헤매며, 결국에는 존재의 공허함과 수치심만을 남기게 됩니다.

넷째, 심판의 자기 초래적(self-inflicted) 성격입니다. 오홀라와 오홀리바는 자신이 그토록 연모하고 의지했던 대상(앗수르, 바벨론 등)에 의해 결국 멸망당합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 대신 선택했던 것들이 결국 자신들을 파멸시키는 도구가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우상은 처음에는 매력적으로 보이지만 결국 섬기는 자를 속박하고 파괴합니다. 이는 마치 현대 사회에서 물질, 권력, 쾌락 등을 숭배하는 이들이 결국 그것들의 노예가 되어 공허감과 파멸에 이르는 것과 유사합니다. 심판은 외부에서 갑자기 닥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들의 선택과 행동 속에 내재되어 있었던 결과가 드러나는 것일 뿐입니다.

현대적 적용 또는 실존적 질문: 우리 시대의 '영적 간음'을 돌아보다

에스겔 23장의 선정적이고 불편한 비유는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져줄까요? 이 고대의 경고는 시대를 초월하여 우리 자신의 신앙과 삶의 방식을 돌아보게 만듭니다.

우리 시대의 '영적 간음'은 무엇일까요?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의지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의 우상이자 영적 간음의 대상일 수 있습니다.

  • 물질만능주의 사회에서 돈과 성공을 하나님보다 더 우선시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은 아닌가?
  • 안정과 안위를 위해 세상의 권력이나 시스템에 무비판적으로 의존하며 하나님의 주권을 잊고 사는 것은 아닌가?
  • 순간적인 쾌락과 만족을 위해 신앙의 원칙을 타협하거나 양심을 저버리는 일은 없는가?
  • 교회나 신앙 공동체조차 세속적인 가치와 성공주의에 물들어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자랑하고 추구하고 있지는 않은가?

오홀라와 오홀리바가 이방 국가의 화려함과 힘에 매료되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세상의 화려함과 유혹에 쉽게 마음을 빼앗기곤 합니다. 그러나 그 끝은 결국 공허함과 수치,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이라는 것을 에스겔은 분명히 경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질투'는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그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기대를 반영합니다. 우리가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길 때 하나님께서 아파하시는 것은,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분으로서 우리와의 깊고 인격적인 관계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질투는 우리를 속박하려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자유와 생명이 있는 당신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태복음 5:8). 우리의 마음이 나뉘어 있다면 어떻게 하나님을 온전히 볼 수 있겠습니까?

오홀리바가 언니의 멸망을 보고도 깨닫지 못한 것처럼, 우리는 역사의 교훈과 타인의 실패로부터 배우고 있습니까? 아니면 같은 실수를 반복하며 어리석음의 길을 걷고 있습니까? 개인의 삶에서도, 사회와 국가의 역사에서도 과거의 잘못을 성찰하지 않으면 비극은 반복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많은 문제들은 어쩌면 과거의 교훈을 잊어버린 결과일지도 모릅니다.

에스겔 23장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 나는 지금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에 신실한가, 아니면 세상의 다른 것들을 더 사랑하며 '영적 간음'을 저지르고 있는가?
  • 나의 삶의 우선순위는 무엇이며,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인가?
  • 나는 과거의 실수나 다른 이들의 실패로부터 교훈을 얻어 더 나은 선택을 하고 있는가?
  • 하나님의 불타는 사랑과 거룩한 질투 앞에서 나는 어떤 응답을 드려야 할까?

결론 요약

에스겔 23장은 오홀라(사마리아)와 오홀리바(예루살렘)라는 두 음녀 자매의 충격적인 비유를 통해, 이스라엘과 유다의 하나님을 향한 배신과 정치적·종교적 타락을 극명하게 고발합니다. 그들의 끝없는 음행은 이방 세력과의 동맹 및 우상 숭배를 상징하며, 이는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파괴하는 영적 간음으로 규정됩니다. 이 선정적인 묘사 이면에는 언약 백성의 배신에 대한 하나님의 깊은 슬픔과 불타는 질투, 그리고 그로 인한 피할 수 없는 심판의 당위성이 담겨 있습니다. 특히 동생 오홀리바는 언니의 멸망을 보고도 깨닫지 못하고 더욱 심한 타락의 길을 걸음으로써 죄의 중독성과 자기 파괴적 성향을 드러냅니다. 결국 그들은 자신이 연모하고 의지했던 이방 세력의 손에 의해 비참하게 멸망당하며, 이는 하나님을 버린 자의 필연적인 종말을 보여줍니다. 에스겔 23장의 불편한 메시지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신실함과 순결함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우며, 세상의 유혹에 빠져 신앙의 본질을 잃어버리는 '영적 간음'의 위험성을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삶의 우선순위를 점검하고 진정한 회개를 통해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을 촉구하는 준엄한 사랑의 외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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