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3장에서 '파수꾼'으로서의 무거운 책임을 부여받고 때로는 침묵을 명령받기도 했던 선지자 에스겔. 이제 에스겔 4장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극적이고도 충격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일련의 상징 행위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마치 한 편의 처절한 무언극처럼 펼쳐지는 에스겔의 기이하고도 고통스러운 행동들은, 예루살렘에 임박한 끔찍한 포위 공격과 그로 인한 참상, 그리고 이스라엘과 유다 민족이 오랫동안 쌓아온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생생하게 예고합니다. 이 장은 단순한 예언 전달의 차원을 넘어, 말이 아닌 몸으로 직접 겪어내는 고통을 통해 메시지의 절박성과 진정성을 극대화하며, 오늘날 우리에게도 죄의 결과와 하나님의 공의라는 묵직한 주제에 대해 깊이 성찰하게 만듭니다.
시대적 배경과 맥락 소개
에스겔 4장의 강렬한 상징 행위들은 여전히 바벨론 포로라는 암울하고 절망적인 시대적 배경 속에서 펼쳐집니다. 이미 수많은 유다 백성이 정든 고향을 떠나 이국의 땅에서 미래를 알 수 없는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고, 그들의 마음의 중심이었던 예루살렘은 막강한 바벨론 제국의 끊임없는 위협 아래 마치 풍전등화처럼 위태로운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러한 극한의 상황 속에서, 포로로 잡혀온 백성들 사이에서는 "과연 우리의 성도 예루살렘이 저 이방인의 손에 함락될 것인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당신의 백성을 정말 완전히 버리신 것인가?" 와 같은 깊은 불안과 뼈아픈 의심이 샘솟았을 것입니다. 동시에 한편으로는 "아무리 그래도 설마 하나님의 거룩한 도성이 이방 민족에게 망하겠는가?"라는 근거 없는 헛된 기대감 또한 교차하며 그들의 마음을 어지럽혔을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극심한 혼란과 영적 공황 상태 속에서, 에스겔은 창조주의 말씀을 받아 일련의 지극히 기이하고도 고통스러운 상징 행위를 통해 예루살렘에 임박한 비극적인 운명을 시각적으로, 그리고 온몸으로 체험적으로 전달해야만 했습니다. 말이 아닌 몸으로 직접 보여주는 예언은, 당시 문자에 익숙하지 않았던 다수의 백성에게 훨씬 더 직접적이고 충격적인 메시지로 다가갔을 것이며, 그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었을 것입니다. 또한, 이미 기존의 수많은 선지자들이 말로써 간절히 전한 수많은 경고와 회개의 촉구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이 끝내 돌이키지 않았기에, 하나님께서는 더욱 강력하고 잊을 수 없는 파격적인 방식을 통해 그들의 완악하고 굳어버린 마음에 경종을 울리려 하셨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처절한 이야기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때로는 백 마디의 말보다 한 번의 진정성 있는 행동이, 안락한 위로의 말보다는 함께 겪는 고통의 공유가 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심판이 결코 감정적인 분노의 무분별한 표출이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쌓이고 쌓인 죄악에 대한 공의롭고 필연적인 결과임을 깨닫게 하는 데 그 궁극적인 목적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핵심 사건 또는 본문 요약
에스겔 4장은 선지자 에스겔이 수행해야 했던 크게 세 가지의 충격적인 상징 행위를 중심으로 구성됩니다. 각각의 행위는 예루살렘의 임박한 포위와 처참한 함락, 그로 인해 백성들이 겪게 될 극한의 고통, 그리고 이스라엘과 유다의 누적된 죄악을 다층적으로 상징하고 있습니다.
첫째, 벽돌 위에 예루살렘 모형을 그리고 포위하는 행위 (1-3절): 창조주께서는 에스겔에게 진흙으로 만든 판(일종의 벽돌)을 가져다가 그 위에 예루살렘 성읍의 모습을 정교하게 그리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그 성읍 모형 주위에 공격 축대와 토담을 쌓고, 적군의 진지를 구축하며, 성벽을 부수는 강력한 공성 망치를 배치하는 등, 마치 실제 전쟁을 방불케 하는 예루살렘 포위 공격 장면을 실감 나게 연출하라고 지시하십니다. 더욱이 에스겔 자신은 단단한 철판을 자신과 성읍 모형 사이에 두어 마치 견고한 철벽처럼 만들고, 그 포위된 예루살렘을 향해 얼굴을 단단히 고정한 채 포위하는 공격자의 역할을 수행해야 했습니다. 이 모든 기이한 행위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다가올 심판의 '징조'가 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불길한 예고입니까!
둘째, 정해진 기간 동안 옆으로 누워 죄를 담당하는 행위 (4-8절): 이어서 에스겔은 왼쪽으로 몸을 돌려 누워 이스라엘 족속의 죄악을 자신의 몸으로 직접 담당해야 했는데, 그 고통스러운 기간은 그들이 범죄한 햇수를 따라 무려 390일이었습니다. 이 기간이 끝나면, 다시 오른쪽으로 몸을 돌려 누워 유다 족속의 죄악을 담당해야 했는데, 그 기간은 40일이었습니다. 창조주께서는 "내가 네게 하루를 일 년으로 정하여 주었다"(에스겔 4:6, 쉬운성경)고 하시며 그들이 지은 죄악의 무게와 기간을 상징적으로 정해주셨습니다. 이렇게 옆으로 누워 있는 동안에도 에스겔은 예루살렘 포위 공격 장면을 그린 벽돌을 향해 얼굴을 계속 고정해야 했고, 팔을 걷어붙인 채 마치 공격을 지휘하듯 예언해야 했습니다. 심지어 창조주께서는 줄로 그를 꽁꽁 묶어 정해진 기간 동안 몸을 이리저리 마음대로 돌리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상상만 해도 숨이 막히는, 처절하고도 고통스러운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셋째, 부정한 떡을 극소량만 만들어 먹는 행위 (9-17절): 에스겔은 밀, 보리, 콩, 팥, 조, 귀리 등 구할 수 있는 온갖 종류의 곡식을 한 그릇에 담아 아무렇게나 섞어 떡을 만들어 먹어야 했습니다. 이는 포위된 성안에서 식량이 극도로 부족해져 좋은 음식을 가릴 것 없이 온갖 잡곡이라도 섞어 먹을 수밖에 없는 극한의 식량난과 기근 상태를 생생하게 상징합니다. 그는 정해진 날수(390일 더하기 40일) 동안 하루에 겨우 이십 세겔(약 230그램 정도의 아주 적은 양) 무게의 음식과 육분의 일 힌(약 0.6리터의 소량)의 물만을 정해진 시간에 조금씩 아껴 먹고 마셔야 했습니다. 더욱 충격적이고 혐오스러운 것은, 그 떡을 사람의 똥, 즉 인분 불에 구워 먹으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 땅으로 흩어져 거기서 율법에 어긋나는 부정한 음식을 먹게 될 것을 상징하는 끔찍한 행위였습니다. 제사장이었던 에스겔이 율법상 부정한 것을 먹을 수 없다며 간절히 간청하자, 창조주께서는 특별히 인분 대신 쇠똥으로 대체하는 것을 허락하십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는 극도의 혐오감과 인간적인 굴욕감을 동반하는 끔찍한 행위였습니다. 이 모든 상징적인 행동들은 예루살렘 주민들이 곧 겪게 될 상상을 초월하는 극심한 굶주림과 절망적인 상황, 그리고 이방 땅에서의 부정함과 수치를 생생하게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에스겔의 고통스러운 상징 행위들은 다음과 같은 핵심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상징 행위 (에스겔 4장) | 내용 및 주요 상징적 의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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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벽돌 위의 예루살렘 포위 연출 (1-3절) | 예루살렘 성읍 모형을 만들고 실제와 같이 포위 공격 장면을 연출함. 선지자가 철판으로 자신과 성읍 사이에 벽을 만듦. 이는 임박한 예루살렘 포위 공격의 확실성과 하나님의 심판 의지를 강력하게 상징함. |
2. 옆으로 누워 죄를 담당 (4-8절) | 왼쪽(이스라엘, 390일)과 오른쪽(유다, 40일)으로 번갈아 누워 각 족속의 죄악의 햇수를 몸으로 감당함. 선지자의 고통과 속박을 통해 죄가 쌓여온 오랜 기간과 그 엄청난 무게를 시각적으로, 체험적으로 전달함. |
3. 부정한 떡을 만들어 소량 섭취 (9-17절) | 여러 곡식을 섞어 극소량의 음식과 물만을 섭취하고, 인분(후에 쇠똥)으로 떡을 구워 먹음. 이는 포위로 인한 극심한 식량난과 끔찍한 굶주림, 그리고 이방 땅에서의 부정함과 굴욕적인 삶을 처절하게 상징함. |
철학적/존재론적 상징 해석
에스겔 4장에 기록된 이 기이하고도 충격적인 상징 행위들은 단순한 예언적 퍼포먼스를 넘어, 인간의 죄와 그로 인한 심판, 고통의 본질, 그리고 정체성의 붕괴라는 심오한 철학적, 존재론적 질문들을 우리 시대의 독자들에게도 여전히 던지고 있습니다.
첫째, 벽돌 위에 그려진 예루살렘과 그 포위 장면의 연출은 인간이 쌓아 올린 모든 것의 허무함과 교만의 필연적인 파국을 극명하게 시각화합니다. 아무리 견고해 보였던 성읍, '하나님의 도성'이라 불리며 영원할 것 같았던 예루살렘이 한낱 보잘것없는 진흙 판 위의 그림처럼 허무하게 포위되고 무참히 공격당하는 모습은,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세운 모든 문명과 업적의 근원적인 유한성과 예측 불가능한 취약성을 날카롭게 드러냅니다. 에스겔이 철판으로 자신과 성읍 모형 사이에 단단한 벽을 만드는 행위는, 백성들의 끊임없는 죄로 인해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깊은 단절이 생겨났음, 즉 이전에는 당연하게 여겼던 신적 보호와 임재의 상실을 뼈아프게 상징합니다. 이는 마치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가 금지된 선악과를 따먹은 후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하나님과의 친밀하고 직접적인 교제가 하루아침에 끊어져 버린 것과 같은, 존재론적인 소외와 근원적인 상실감을 연상시킵니다. 결국 인간의 반역과 불순종이 초래하는 피할 수 없는 결과인 것입니다. 아, 인간의 오만함이여!
둘째, 선지자가 오랜 기간 옆으로 누워 백성들의 죄를 대신 담당하는 행위는 '대리 고통(vicarious suffering)'이라는 심오한 개념과 함께, '시간이 갖는 무게'와 그 누적된 결과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만듭니다. 에스겔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백성이 수백 년이라는 장구한 세월 동안 차곡차곡 지어온 그 엄청난 죄의 기간을, 자신의 연약한 몸으로, 하루를 마치 일 년처럼 환산하여 묵묵히 감당해야 했습니다. 이는 신약에서 그려지는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고난과 그 희생을 어렴풋이나마 예표하는 듯한 모습으로 해석될 여지도 충분히 있지만, 일차적으로는 백성들의 죄가 얼마나 오랫동안 뿌리 깊게 누적되었으며, 그 죄의 무게가 얼마나 상상 이상으로 크고 무거운지를 그들 스스로가 처절하게 체감하도록 하는 행위였습니다. 프랑스의 여성 철학자이자 신비사상가였던 시몬 베유(Simone Weil)는 인간 고통의 문제를 깊이 천착하며, 타인의 고통에 대한 진정한 관심과 구체적인 연대의 중요성을 평생에 걸쳐 강조했습니다. 에스겔의 이 기이한 행위는 단순한 동정이나 연민의 감정을 훨씬 뛰어넘어, 백성들의 죄와 그로 인해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고통을 자신의 몸으로 직접 짊어지려는, 처절하고도 자기희생적인 몸부림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길고도 지루한 시간 동안 꼼짝없이 한쪽으로만 누워 있어야 한다는 것은, 한 인간에게 존재론적인 무력감과 극심한 속박감을 극한까지 경험하게 했을 것입니다. 얼마나 외롭고 힘겨운 시간이었을까요?
셋째, 극도로 제한되고 심지어 부정한 방식으로 만들어진 떡을 먹는 행위는, 인간의 기본적인 존엄성과 한 개인 및 공동체의 정체성이 극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얼마나 처참하게 훼손되고 붕괴될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음식은 인간 생존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일 뿐만 아니라, 한 문화와 공동체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유지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정결한 음식을 통해 자신들의 거룩함과 선민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고자 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온갖 잡곡을 아무렇게나 섞어 만든 아주 적은 양의 떡, 그것도 사람의 배설물이나 동물의 똥으로 구운 떡을 먹어야 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힘든 극도의 굴욕이자 정체성의 심각한 위협이었을 것입니다. 이는 전쟁과 기근이라는 극한 상황이 인간을 얼마나 비참하고 동물적인 수준으로까지 전락시킬 수 있는지를 통렬하게 고발합니다. 또한, 이방 땅에서 강제로 부정한 음식을 먹게 된다는 것은, 그들이 그토록 자랑스러워했던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선민의식의 처참한 해체와 자기 부정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마치 20세기 실존주의 문학 작품들에서 자주 등장하는, 전쟁이나 재난과 같은 극한 상황에 내몰린 인간이 기존에 믿고 따르던 모든 가치 체계가 송두리째 무너지고 존재의 근원적인 불안과 무의미함에 정면으로 대면하는 모습과도 깊이 맞닿아 있습니다. 과연 인간의 존엄성은 어디까지 지켜질 수 있는 것일까요? 이 질문은 시대를 넘어 우리에게 계속해서 울리고 있습니다.
현대적 적용 또는 실존적 질문
에스겔 4장에 기록된 이처럼 충격적이고도 고통스러운 상징 행위들은, 과연 수천 년이라는 시간의 강을 건너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던져줄 수 있을까요? 이 고대 선지자의 처절한 퍼포먼스는 단순한 과거의 종교적 기록을 넘어, 우리 시대가 안고 있는 다양한 문제들과 우리 각자의 개인적인 삶의 여정에 대한 깊은 성찰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첫째,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강력한 경고의 필요성입니다. 에스겔 선지자의 시대처럼, 오늘날에도 우리는 매일같이 쏟아지는 수많은 말과 정보의 홍수 속에서 정작 우리 자신과 공동체의 생존에 직결되는 중요한 경고의 메시지를 너무나 쉽게 놓치거나 의도적으로 외면하며 살아가기 쉽습니다. 우리 사회의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구조적인 죄악의 문제들, 예를 들어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 인간 소외, 다양한 형태의 차별과 혐오, 그리고 지구 전체의 생존을 위협하는 환경 파괴의 심각성 등은 이미 수많은 전문가들과 양심 있는 선각자들이 목소리 높여 경고하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경우 마치 "쇠귀에 경 읽기"처럼 무감각하게 받아들여지거나 심지어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에스겔의 파격적인 상징 행위는 때로는 평범한 말이 아니라, 직접적이고 충격적인 '보여주기'와 '체험하게 하기'가 사람들의 굳어진 마음을 움직이고 구체적인 변화를 촉구하는 데 훨씬 더 효과적일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사회의 '벽돌 위에 그려진 예루살렘'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어떤 절박한 메시지를 몸으로 외쳐야 할까요?
둘째, 죄의 결과와 그 무게에 대한 진지한 인식입니다. 에스겔이 390일과 40일 동안이나 옆으로 누워 백성들의 죄를 담당했던 것은, 개인의 잘못된 선택과 행동이 단지 개인적인 문제로 끝나지 않고 공동체 전체에, 그리고 여러 세대에 걸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현대 사회는 종종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극대화하는 과정에서 그에 따르는 책임과 결과에 대해서는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에스겔의 고행은 우리에게 "나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그리고 미래 세대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라는 질문을 진지하게 던지도록 만듭니다. 또한, 부정한 떡을 먹는 장면은 죄가 우리의 영혼과 삶을 얼마나 피폐하게 만들고, 기본적인 존엄성마저 잃게 할 수 있는지를 경고합니다. 혹시 우리는 일상의 작은 불의나 타협들을 가볍게 여기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셋째, 고통을 통한 소통과 연대의 가능성입니다. 에스겔은 말로만 심판을 선포한 것이 아니라, 직접 고통을 겪음으로써 그 메시지의 진정성과 절박성을 전달했습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진정한 소통과 변화는 때로는 안락한 논리나 화려한 수사가 아니라, 고통받는 이들의 아픔에 동참하고 연대하는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사회적 약자들의 고통에 귀 기울이고, 그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려는 노력 없이 어떻게 정의롭고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어갈 수 있을까요?
"고통은 때로 가장 강력한 언어이며, 연대는 그 언어를 이해하는 가장 진실된 방법이다."
에스겔 4장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실존적인 질문들을 던지게 합니다:
- 나는 내 삶과 우리 사회의 '죄'에 대해 얼마나 민감하게 인식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 얼마나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가?
- 나는 안일함과 무관심에서 벗어나, 공동체의 아픔을 알리고 변화를 촉구하기 위해 어떤 '상징적인 행동'을 할 수 있을까?
- 나는 다른 사람의 고통에 얼마나 공감하며, 그들의 짐을 함께 나누려는 마음과 실천을 가지고 있는가?
-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은 때로는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드러날 수 있음을 인정하고 있는가?
이 기이한 선지자의 이야기는 결국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지만, 바로 그 불편함 속에서 진정한 자기 성찰과 세상에 대한 새로운 책임감을 발견하도록 이끌고 있습니다. 참으로 도전적인 메시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결론 요약
에스겔 4장은 예루살렘에 임박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일련의 충격적이고도 고통스러운 상징 행위를 통해 예고하는 장입니다. 선지자 에스겔은 벽돌 위에 예루살렘 모형을 그리고 포위 공격 장면을 연출하며, 장기간 옆으로 누워 이스라엘과 유다의 누적된 죄악을 자신의 몸으로 감당하고, 극소량의 부정한 떡을 먹는 기이한 행동들을 통해 메시지의 절박성과 확실성을 생생하게 전달했습니다. 이러한 행위들은 단순한 예언 전달을 넘어, 백성들의 완악한 마음을 깨우고 죄의 심각성과 그로 인한 비참한 결과를 처절하게 깨닫게 하려는 하나님의 의도를 담고 있습니다. 에스겔의 고행은 죄의 무게, 하나님의 공의, 그리고 심판의 불가피성을 강력하게 시사하며, 동시에 고통을 통한 소통과 연대의 가능성이라는 깊은 울림을 남깁니다. 이 고대 선지자의 기이한 퍼포먼스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개인과 공동체의 죄악에 대한 민감한 인식, 진리를 알리기 위한 용기 있는 행동, 그리고 타인의 고통에 동참하는 책임감 있는 삶의 자세를 촉구합니다. 결국 에스겔 4장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메시지를 온몸으로 살아내려 했던 한 선지자의 처절한 순종을 통해,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시대적 소명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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