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자야, 네 발로 일어서라!" 에스겔 2장, 고통의 소명과 그 현대적 의미

Prophet Ezekiel receiving a divine scroll of lamentations and woes from God, symbolizing his challenging prophetic calling to a rebellious nation, as depicted in Ezekiel chapter 2.

에스겔 1장에서 하늘의 영광이라는 압도적인 신현(神顯)을 경험한 선지자 에스겔. 이제 에스겔 2장은 그 경외로운 체험 이후, 땅에 엎드린 한 인간에게 구체적이고도 가혹한 소명이 주어지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 장은 단순한 예언 활동의 시작을 넘어, 불순종과 반역이 일상화된 공동체를 향해 진리를 선포해야 하는 예언자의 깊은 고뇌와 그 사명의 본질을 날카롭게 파고듭니다. 에스겔 2장에 나타난 창조주의 부르심, 수신자인 이스라엘 백성의 완악함, 그리고 애가와 재앙으로 가득 찬 두루마리의 상징성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묵직한 영적 성찰과 실존적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시대적 배경과 맥락 소개

에스겔 2장의 이야기는 1장에서 펼쳐진, 인간의 언어로는 형언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영광의 환상 직후로 이어집니다. 에스겔은 당시 바벨론 제국의 그발 강가, 즉 이국땅에 포로로 잡혀와 절망적인 나날을 보내던 유다 백성 중 하나였습니다. 그의 조국 남유다는 이미 바벨론의 침략으로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였거나, 혹은 멸망의 수순을 밟고 있었고, 백성들은 정치적·신앙적 대혼란과 함께 정체성의 상실이라는 깊은 수렁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러한 암울한 현실 한복판에서 에스겔은 창조주의 주권적인 임재를 강렬하게 체험했지만, 그 놀라운 체험이 곧바로 개인적인 안위나 민족의 즉각적인 해방으로 연결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2장은 그 영광스러운 만남이 그에게 얼마나 무겁고 때로는 고통스러운 사명을 부여하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당시 유다 백성들은 오랜 세월 동안 창조주를 향한 불순종과 우상 숭배를 일삼으며 언약 관계를 스스로 깨뜨린 상태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한 신앙 체계마저 뿌리째 흔들리는 상황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죄악을 통렬히 깨닫고 회개하기보다는 당장의 고통에 절망하거나, 혹은 근거 없는 헛된 희망에 매달리며 현실을 외면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총체적인 영적 암흑기에, 에스겔은 바로 그들을 향해 창조주의 말씀을 가감 없이 대언하는 예언자로 부름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이 이야기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한 개인의 깊은 신앙적 체험이 어떻게 공동체를 향한 구체적이고도 책임감 있는 사명으로 전화(轉化)되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또한, 듣는 이들이 거부하고 반발할 것을 알면서도 진리를 외쳐야만 했던 한 예언자의 고독한 사투와 그 심리적 갈등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드러냄으로써, 오늘날에도 자신의 신념에 따라 때로는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아야 하는 모든 이들에게 깊은 공감과 함께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줍니다.

핵심 사건 또는 본문 요약

에스겔 2장의 핵심 내용은 창조주께서 선지자 에스겔에게 그의 구체적인 사명을 부여하시는 장면, 그 사명의 직접적인 대상이 되는 이스라엘 백성의 영적 상태에 대한 진단, 그리고 그가 백성들에게 전달해야 할 메시지의 내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두루마리 사건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1장 말미에서 창조주의 영광 앞에 압도되어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던 에스겔에게, "인자야, 네 발로 일어서라. 내가 네게 할 말이 있다."(에스겔 2:1, 쉬운성경)라는 위엄 있는 음성이 들려옵니다. 그 말씀과 동시에 성령(하나님의 영)이 에스겔에게 임하여 그를 일으켜 세우셨고, 비로소 그는 창조주의 말씀을 또렷이 듣게 됩니다.

창조주께서는 에스겔을 보내시는 대상에 대해 명확히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이스라엘 자손, 곧 반역하는 민족, 나에게 반역하는 자들에게 보낸다. 그들과 그들의 조상들이 오늘날까지 나에게 죄를 지었다."(에스겔 2:3, 우리말성경). 또한 그들은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굳을 대로 굳은 자들이다."(에스겔 2:4, 새번역)라고 신랄하게 규정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조주는 에스겔에게 그들에게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단호히 명령하십니다. "그들이 듣든지 안 듣든지(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이다), 그들 가운데 예언자가 있었다는 것만은 알게 될 것이다."(에스겔 2:5, 우리말성경)라는 말씀은, 메시지 전달의 결과보다는 선포 행위 자체의 중요성과 하나님의 공의로운 증거가 세워지는 데 초점이 있음을 시사합니다.

이러한 상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구분 내용
하나님의 명령 "일어서라", "내가 너를 보낸다", "내 말을 그들에게 고하라"
백성의 상태 패역한 백성, 배반하는 자,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굳은 자
선지자의 자세 두려워하지 말라 (백성의 말, 얼굴, 위협 등)
메시지의 본질 두루마리에 기록된 애가, 애곡, 재앙의 말 (듣든지 아니 듣든지 선포)

창조주께서는 에스겔에게 백성들의 반응이나 위협에 굴하지 말고 담대하라고 격려하십니다. "너 인자야, 그들을 무서워하지 말며 그들의 말을 무서워하지 말지어다. 비록 네가 가시와 찔레 가운데 있으며, 전갈 가운데 거할지라도 그들의 말을 무서워하지 말며 그들의 얼굴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패역한 족속임이니라."(에스겔 2:6, 개역한글) 이어서, 에스겔은 창조주의 손에 펼쳐진 한 두루마리 책을 보게 됩니다. 그 두루마리의 "안팎으로 글이 있는데, 그 내용은 슬픈 노래와 탄식과 재앙에 관한 것이었다."(에스겔 2:10, 쉬운성경). 그리고 창조주께서는 에스겔에게 그 두루마리를 먹으라고 명령하시며, 그것을 먹고 이스라엘 족속에게 가서 말하라고 하십니다(에스겔 2:8-9, 3:1). 아, 이 얼마나 충격적인 명령입니까! 이는 선지자가 전해야 할 메시지가 결코 듣기 좋거나 위로가 되는 내용이 아니며, 오히려 백성들의 죄악으로 인한 피할 수 없는 고통과 심판의 경고임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상징적 행위입니다.

철학적/존재론적 상징 해석

에스겔 2장에 등장하는 상징들은 단순한 비유를 넘어, 심오한 철학적, 존재론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 의미를 하나씩 풀어보겠습니다.

첫째, "인자야, 네 발로 일어서라"는 명령입니다. 이는 단순한 물리적 기립(起立)을 촉구하는 것을 넘어, 압도적인 신적 현현 앞에서 완전히 무력감과 경외감에 사로잡혀 있던 한 인간이, 이제 능동적이고 책임 있는 사명의 주체로 전환되는 극적인 순간을 포착합니다. 이 장면은 마치 깊은 절망이나 삶의 무의미 상태에 빠져 있던 개인이 어떤 계기를 통해 삶의 본질적인 목적과 책임을 새롭게 자각하고 실존적 결단을 내리는 과정과도 유사합니다. 덴마크의 실존주의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는 인간 실존의 핵심을 '주체적 결단'과 '선택'에서 찾았습니다. 그에 따르면, 신 앞에 선 단독자로서의 개인은 불안과 역설 속에서도 믿음의 도약을 통해 자신의 실존을 선택해야 합니다. 에스겔은 바로 창조주의 부르심 앞에서 자신의 모든 존재를 걸고 응답해야 하는 실존적 상황에 놓인 것입니다. 그의 '일어섬'은 단순한 복종을 넘어, 다가올 고난과 저항을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소명에 대한 주체적인 수용이자, 새로운 존재 방식으로의 진입을 의미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변화의 시작입니다!

둘째, 이스라엘 백성을 "패역한 족속",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굳은 자"로 규정하는 대목입니다. 이는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지와 그 결과로서의 책임, 그리고 한 개인을 넘어선 집단적 죄악의 심각성을 동시에 제기합니다. 창조주께서는 그들의 완고함과 불순종의 역사를 이미 명확히 알고 계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지자를 통해 경고의 말씀을 전하게 하십니다. 여기에는 인간에게 마지막 순간까지 회개의 기회를 주시려는 창조주의 한없는 인내와 사랑이 담겨 있는 동시에, 설령 그들이 끝내 듣지 않는다 하더라도 진리가 선포됨으로써 그들 가운데 창조주의 공의가 명백히 드러나게 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습니다. 이는 또한 예언자가 필연적으로 겪게 될 딜레마, 즉 청중의 거부와 냉대를 예상하면서도 외로이 진리를 외쳐야만 하는, 그 고독하고도 무거운 사명의 무게를 암시합니다.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곳에서 외치는 것, 얼마나 힘든 일일까요?

셋째, "두루마리를 먹으라"는 명령과 그 두루마리에 기록된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은 이 장에서 가장 강렬하고도 다층적인 상징입니다. 말씀을 '먹는다'는 행위는, 정보를 단순히 지식으로 습득하거나 이해하는 차원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그것은 전달해야 할 메시지를 자신의 온 존재로 받아들이고, 그것과 완전히 하나가 되어 내면화하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에스겔은 자신이 선포해야 할 그 쓰라린 심판과 슬픔의 메시지를, 마치 음식을 섭취하여 자신의 몸과 피로 만들듯, 자신의 존재 가장 깊은 곳으로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이는 곧 백성들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체화(體化)하고, 그들의 죄악으로 인한 창조주의 아픔을 깊이 공감해야 함을 뜻합니다. 오스트리아의 정신과 의사이자 로고테라피(Logotherapy, 의미치료)의 창시자인 빅터 프랭클(Viktor Frankl)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강제 수용소라는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발견함으로써 인간은 절망을 극복하고 살아갈 힘을 얻는다고 역설했습니다. 에스겔에게 이 고통스러운 말씀을 '먹는' 행위는, 그 메시지가 아무리 절망적일지라도 그것을 전하는 것 자체에서 자신의 소명적 의미를 찾고, 그 의미를 통해 고통을 초월하려는 실존적 몸부림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이 두루마리는 훗날 에스겔의 입에는 꿀같이 달았다고 묘사되는데(에스겔 3:3), 이는 창조주의 말씀 자체가 지닌 신적인 권위와 진리됨의 속성은 본질적으로 선하고 달콤하지만, 그 내용이 인간의 죄와 그로 인한 심판을 다룰 때는 필연적으로 쓰라릴 수밖에 없는 말씀의 양면성을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진리는 때로 쓰지만, 결국 영혼에는 단 법이니까요.

현대적 적용 또는 실존적 질문

에스겔 2장의 메시지는 수천 년이라는 시간의 간극을 훌쩍 뛰어넘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강력한 도전과 함께 깊은 실존적 질문들을 던져줍니다. 우리 역시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크고 작은 형태로 어떤 '소명' 또는 '부르심'을 느낄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거창한 종교적 사명일 수도 있고, 혹은 자신이 몸담은 직업 현장에서의 윤리적 책임감, 사회 구성원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정의감, 또는 가장 가까운 관계 속에서 울리는 개인적인 양심의 소리일 수도 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처럼, 우리가 세상에 전해야 할 진실이나 마땅히 감당해야 할 책임이 때로는 듣는 이들에게는 지극히 불편하거나 심지어 고통스러운 내용을 담고 있을 수 있습니다.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굳은" 것과 같은 태도를 보이는 대상에게, 혹은 이미 기득권의 안락함에 깊이 빠져 변화를 거부하는 이들에게 진실을 말해야 하는 상황은, 비단 고대 예언자만의 경험은 아닐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사회 곳곳에서 이러한 상황과 마주합니다. 예를 들어, 사회적 불의나 구조적 악에 대해 다수가 침묵하거나 동조하는 분위기 속에서 용기를 내어 정의의 목소리를 높여야 할 때, 자신이 속한 조직 내의 부조리나 비윤리적인 관행을 용기 있게 지적해야 할 때, 혹은 가장 가까운 친구나 가족에게조차 듣기에는 힘들지만 꼭 필요한 충고를 건네야 할 때, 우리는 에스겔과 유사한 심적 고뇌와 갈등에 직면할 수 있습니다.

창조주께서 에스겔에게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말씀을 전하라고 하신 명령은, 성공 지상주의와 결과 중심적인 현대 사회의 지배적인 가치관에 중요한 반문을 제기합니다. 눈에 보이는 즉각적인 성공이나 긍정적인 변화가 보이지 않더라도, 옳은 일을 꾸준히, 그리고 신실하게 행하는 것 그 자체에 깊은 의미가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입니다. 또한, "두루마리를 먹으라"는 그 독특한 명령은, 우리가 어떤 메시지나 가치를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기 이전에, 먼저 그것을 우리 자신의 삶 속에서 깊이 내면화하고 진정으로 소화하여 삶으로 살아내야 함을 강력하게 강조합니다. 단순히 피상적인 지식의 전달이나 말뿐인 공허한 주장이 아니라, 전달하는 메시지에 대한 깊은 확신과 진정성, 그리고 삶의 무게감을 가지고 다가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소통은 단지 말의 전달에 있지 않다. 그것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자의 삶과 인격이 그 메시지와 온전히 하나가 될 때, 비로소 그 울림이 시작된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과연 어떤 '두루마리'를 먹고 소화해야 할까요? 어쩌면 그것은 우리가 애써 외면하고 싶어 하는 우리 사회의 어두운 현실일 수도 있고, 혹은 개인의 온전한 성장을 위해 반드시 마주해야 하는 불편한 자기 성찰의 과제일 수도 있습니다. 에스겔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실존적 질문들을 끊임없이 던지게 합니다:

  • 나는 지금 내 삶의 자리에서 어떤 '창조주의 음성' 또는 '시대의 양심의 소리'를 듣고 있는가? 혹시 그 소리를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가?
  • 나는 타인의 시선이나 거부당할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마땅히 해야 할 말이나 감당해야 할 행동을 주저하거나 회피하고 있지는 않은가?
  • 내가 다른 이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소중한 가치와 메시지를, 나 자신부터 먼저 온전히 '먹고 소화'하여 내 삶의 일부로 진정성 있게 살아내고 있는가?
  • 때로는 그것이 고통과 재앙을 예고하는 메시지라 할지라도, 그것이 궁극적으로 사랑과 정의, 그리고 회복에 기반한 것이라면 담대하게 선포할 용기가 내 안에 있는가?

결국 에스겔의 소명 이야기는 우리에게 안일함과 자기만족에서 벗어나, 시대의 아픔에 민감하게 동참하며 진리를 위해 기꺼이 고난을 감수하는 능동적이고 책임 있는 삶의 자세를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 이 얼마나 무겁고도 영광스러운 부름입니까!

결론 요약

에스겔 2장은 창조주의 압도적인 영광을 직접 목도한 한 연약한 인간에게 주어지는, 구체적이고도 지극히 고통스러운 사명의 본질을 생생하게 그려내는 한 폭의 드라마와 같습니다. 선지자 에스겔은 패역하고 완악한 마음을 가진 자신의 동족들에게, 창조주의 임박한 심판과 그로 인한 재앙의 메시지가 빼곡히 기록된 두루마리를 먼저 '먹고' 그것을 전하라는 준엄한 명령을 받습니다. 이 특별한 명령은 선지자의 길이 결코 인간적인 영광이나 안락함과는 거리가 멀며, 오히려 백성들의 뿌리 깊은 죄악으로 인한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깊이 체화하고, 그들의 냉담한 거부와 격렬한 반발까지도 묵묵히 감수해야 하는 고난의 길임을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 가운데에 선지자 있음을 알게 할지니라"는 창조주의 말씀은, 결과에 연연하기보다는 진리를 선포하는 행위 그 자체의 절대적인 중요성과 신적 권위를 강조합니다. 에스겔의 소명 수락은 개인적인 두려움과 인간적인 무력감을 뛰어넘는 실존적 결단이며, 창조주의 말씀에 대한 전적인 순종과 신뢰의 표현입니다. 이 고대의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마주하게 되는 다양한 형태의 '소명' 앞에서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지, 그리고 때로는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진실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사랑과 책임감을 가지고 전달해야 하는 예언자적 삶의 무게와 그 궁극적인 가치를 깊이 성찰하게 합니다. 절망적인 포로기의 상황 속에서도 창조주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떨리는 다리로 일어서는 에스겔의 모습은, 우리 역시 어떠한 어려움과 반대 속에서도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을 향해 담대히 나아가야 함을 강력하게 일깨워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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